담임목사 칼럼

사랑의 오해와 진실

사랑에 관한 오해와 진실


저는 지난 주일,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사명의 길이 곧 사랑의 길이셨고, 우리도 그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길은 선택이 아닌, 의무이며,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심령에 부어 주신 성령의 은혜와 능력, 곧 Zoe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는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을 능히 걸어갈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참고로 설교 때, 시간 관계상 말씀드리지 못한 점을 잠시 말씀드리면, 요한일서 5장 11-13절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에 자주 나오는 “영생”이라는 단어를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영생”은 “믿는 자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영원한 생명, 곧 생명력”, 즉, “믿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다른 이를 능히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뿐 아니라, 죄와 싸워 승리하도록 만들어주는 영적 파워와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6, 8절은 “믿는 자는 성령과 물과 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고, 5장 1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자는 반드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5장5장 18절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곧 믿는 자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사랑에 관한 말씀을 전한 후, 한 성도님께서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회사에 직원들을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분이 있는데, 그분을 그냥 가만히 기다려주고 내버려둬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혹시 그분이 성도님만 힘들게 합니까?” 예전에는 그런 줄로 알고, 그냥 용서하고 이해하고 넘어가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으며, 마침 성도님이 그 직원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자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은 기회를 잃으셨습니다. 집사님 같이 하나님 믿고 용서하고 기도로 축복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에서 멈췄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군요. 이제 하나님께서 집사님과 회사를 위해, 직원들을 위해 그분을 책망하려고 하시나 봅니다. 그냥 회사 규칙대로 하셔서, 회사와 직원들을 보호하십시오. 전에는 사적인 일이었으나, 이제는 공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성도님이 하시는 일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믿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무조건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랑장 고린도전서 13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6절에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옳지 않은 일을 그냥 넘어가거나 품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방관이며, 영혼을 지옥에 빠트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지혜와 분별이 필요합니다. 레위기 19장 15절에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고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네 이웃을 재판할 지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고”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라고 약자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도 부자도 모두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면죄부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법규와 법치가 무너집니다. 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우리 주변에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입술과 행동으로 대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하나됨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권면이 대상입니다. 고린도 전후서를 보면, 고린도 교회가 사분오열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열된 고린도 교회를 호되게 책망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호되게 책망하였는지, 고린도후서에서 사도 바울은 미안해하며, “내가 당신들을 꾸짖을 목적으로 책망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책망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큰 회개와 부흥이 있었지 않습니까?”라고 자신을 변호할 정도였습니다. 

교회에는 아주 가끔 책망과 권면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2절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경책은 죄를 드러낸다는 뜻이고, 경계는 경고한다는 뜻이며, 권함은 다시 돌이키도록 이끌어준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5장 19–20절은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이라고 했습니다. 15년 전, YDC 청년부를 섬길 때, 한 자매가 신천지에 빠졌습니다. 만나서,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이단이니 돌아오라고 강하게 권면했습니다. 신천지의 꾀임을 마구 험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이 절절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더 따뜻하게 대해준다는 이유로 제 권면을 무시했습니다. 그 자매를 위해 수년을 기도했었습니다. 제가 알기로 지금도 신천지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제는 제 손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요한일서 5장 16-17절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까지 증거합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는 “더 이상 그 마음과 양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죄”, 다시 말해 “멸망당 할 죄”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죄는 많지 않겠지만, 회개할 마음이 없고, 거짓과 위선으로 자신의 죄를 포장하면, 양심이 타락하고 믿음은 구멍이 나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배처럼, 거짓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만일, 형제나 자매가 간음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당장 모든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회개 이전에 당사자에게 용서를 약속하거나 주위 사람들에게 용서와 이해를 강요하는 것은 영혼을 방치하여 멸망하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공의 없는 사랑은 간음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그녀가 이미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돌에 맞아 죽는 심판을 각오한 것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회개해 놓고 또 간음하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그녀를 간접적으로 책망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랑을 지혜롭게 하는 일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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